27 novembre, 2010

한국남자들이 말귀를 못알아 듣는 이유 (hook) 2010.11.25일자

살다 보면 그런 인간 꼭 있다. 도무지 남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한 이야기 하고 또 해도 매번 같은 자리다. 도대체 어쩌면 이럴까 싶은 마음에 답답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교수들이 그렇다. 평생 남을 가르치기만 할 뿐, 남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내 가족의 불만도 마찬가지다. 매번 자기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양 백 마리를 끌고 가는 것보다 교수 세 명 설득해서 데리고 가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도 한다.

 의사소통 장애는 교수의 직업병이다. 교수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지고, 남의 말귀는 못 알아듣는다. 이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은 단순하다. 의미 공유가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같다고 누가 보장해주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암묵적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관계가 삐걱대는 이유는 서로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 혹은 섹슈얼리티가 사랑의 의미에서 빠져나가는 중년 부부에게 의사소통 장애는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결혼 23년차인 내게 사랑은 ‘아침식사’다. 아침식사를 집에서 못 얻어먹으면 더는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내에게 사랑은 ‘배려’다.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구체적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기준이다. ‘아침식사’와 ‘배려’의 의미론적 구조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매번 힘들다.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공유되는 것일까?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통해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지적·논리적 의미의 공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동일한 정서적 경험이다. 엄마의 품안에서 아기는 엄마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 아기가 놀라면 엄마는 같이 놀라고, 아기가 기뻐하면 엄마는 함께 기뻐한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는 이 정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의미 공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연인들이 놀이공원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위적으로라도 과장된 정서공유의 경험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함께 구성하려는 것이다.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일수록 이런 정서공유의 경험이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젊어서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한 부부의 이혼율이 높은 것이다. 결혼이 일상이 되면, 그 번잡한 일상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 경험이 밋밋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변한다.

 정서공유의 경험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야 한다. 말귀 못 알아듣는 한국 남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경험에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도대체 뭘 느끼는지 알아야 타인과 정서를 경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증상을 정신병리학에서는 ‘감정인지불능’(Alexithymie)이라고 한다. 이 증상이 심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결정적인 문제는 판단력 상실이다. 인지능력은 멀쩡하지만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아주 황당한 결정을 하게 된다. 돌아보면 주위에 너무 많다.

 멀쩡한 집 놔두고, 토마토케첩만 가득한 달걀토스트를 들고 서 있는, 그 싸한 길거리 기분부터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손님에 대한 아무 ‘배려’ 없이, 펄펄 끓는 물을 부어 만든 싸구려 원두커피에 혓바닥을 델 때의 그 분노가 처절해질 때쯤, 아내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형용사가 다양해져야 남의 말귀를 잘 알아듣게 된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라곤 기껏해야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 몇 개가 전부인 그 상태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거다.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22 novembre, 2010

두번째,

제목을 왜 저렇게 적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한가지 사실은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두번째 라는 것.

내 시간의 일정한 순환과정이 있다. 어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이 나에게 세상을 주더라.
그런데 그것이 요즘에 또 시작되었다.

지금 정신이 멍하다. 책상에서 엎드려 자고 일어나면 모두가 다 이렇나보다. (라고 단정짓는다.)

고개를 삐딱하게 하니 눈도 삐딱하게, 수평이 맞춰지지 않아서 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이내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곡이 끝날때까지 또 멍 때리기가 시작되었다.

내일은 TCF 시험을 친다. 시험치는 전날의 행동들은 무엇을 해도 신경쓰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최근 몇주 동안의 내 행동들은 마치 내일 시험치는 사람 다웠다. 어딘지 약간은 불안해보이는 사람.
친구는 그랬다. 정확히 생각은 안나지만 그렇게 살면 후회한다는 식으로.

....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너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더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느끼지 못한걸 나는 느꼈기 때문에.

각자 삶 어느 단계에서 자신의 능력치를 최대로 발휘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지금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치만 그게 잘 안된다. 그러면 얼마나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지 너 역시 잘 알겠지.
그래서 나는 더더욱 세상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좀 문제가 되겠다.

나의 현실감각에서 느끼는 불안은 적어도 남들의 열배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삶은 고달프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프랑스에 오면 모든게 다 잘 풀릴 줄 알았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현재 자신이 있지 않은, 그 미지의 세계에 가면 모두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헤밍웨이도 그랬다.

이것만 끝나면 실컷 놀아야지, 여행가야지, 책 읽어야지 ....

답도 없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체인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걸 보면 나도,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쩔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아껴줘야겠다.
 당신도, 나도.

그리하여 다시 세상을 되찾아와야겠다.
 

21 novembre, 2010

한 친구가 있다.

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
모든게 자유로워 보이는 친구다.
함께 있으면 나마저 자유의 여신상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즐겁다.

그런데 매일 이 친구와 헤어지면 나는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한 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잔인하지만, 말 그대로 그렇게, 그런 기분이 든다.
영원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만 또 어느새 이것들이 착각이었구나 하게 만드는 친구다.
뭐랄까.

그냥 알 수 없는 친구.